고흥 거금도(금산) 역사 탐방

절이도 목장성, 홍연 고산목, 금의시비공원, 거금도 기독교 전래 역사, 신흥교회, 명천교회, 오천교회 등

소재열 | 기사입력 2021/10/03 [15:39]

고흥 거금도(금산) 역사 탐방

절이도 목장성, 홍연 고산목, 금의시비공원, 거금도 기독교 전래 역사, 신흥교회, 명천교회, 오천교회 등

소재열 | 입력 : 2021/10/03 [15:39]

 

 거금도에서 소록도를 바라본 거금대교 ©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가 있다. 거금도를 금산이라 한다. 거금도의 섬 전체가 금산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흥군에 있는 거금도의 섬 전체가 말 그대로 ‘거금’이다.

 

고흥군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남동단에 있는 군이다. 남쪽으로 돌출한 고흥반도와 175개의 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삼면에 바다를 끼고 있는 반도 지역이다.

 

▲ 왼쪽이 녹동항, 우측이 소록도, 정면의 섬이 거금도이다. 녹동항과 소록도, 그리고 거금도가 한 장면이다.  © 리폼드뉴스


○ 고흥군과 거금도의 연혁

 

고흥지역은 장흥부의 고이부곡(高伊部曲, 혹은 猫部曲)이었는데 고려 1285년(충렬왕 11)에 고흥현으로 승격되고 감무가 설치되어 독립되었다. 그러나 여말선초에 왜구의 침입과 약탈이 심하여 보성군의 조양현(兆陽縣)으로 읍의 치소를 옮겼다.

 

1397년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로 하여금 판현사(判縣使)를 겸하게 했다가 1441년(세종 23)에 장흥부의 두원현으로 옮기고 보성군의 남양현(南陽縣)을 비롯하여 태강현(泰江縣)·두원현(荳原縣)·도화현(道化縣)·풍안현(豊安縣)·도양현(道陽縣) 등의 속현을 편입시켜 고흥과 남양의 끝 글자를 따라 흥양현이라 정했다. 흥양의 별호는 고양(高陽)이었다.

 

고흥군 지도  © 리폼드뉴스


흥양현이 1895년과 1896년의 지방제도 개혁으로 전라남도 흥양군이 되었으며, 1914년 군면 폐합 때 흥양군 일원과 돌산군 일부를 병합하여 고흥군으로 개칭했다.

 

고흥군 도양읍에서 남쪽으로 3.8㎞ 지점에 있는 거금도는 섬 전체가 금산면의 행정구역과 일치한다. 소록도에서 1.6㎞ 떨어져 있으며, 면적은 63.57㎢이고, 해안선 길이는 54.0㎞이다. 주변에는 연홍도·오동도·형제도·죽도·소취도·대취도 등 많은 부속 섬들이 있다.

 

 거금도 오천항에 있는 국도 27호선 시점 탑 © 리폼드뉴스


조선 시대에는 도양목장에 속한 섬으로 절이도(折爾島)라고 하였다. 이후 강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896년에 광양·낙안·순천·흥양에 속한 69개 도서를 병합하여 남원부 돌산군(突山郡)을 신설하였다.

 

신설된 돌산군은 8개 면을 설치하였으며, 그중 하나가 금산면이었다. 금산면이 돌산군에 속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돌산군에서 고흥군에 속한 금산면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리폼드뉴스


거금도는 섬에 큰 금맥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조선 중기의 문헌에 ‘거억금도(巨億金島)’라고 기록되어 있어 여기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섬의 중앙에 있는 적대봉 산록에는 진막금·전막금·욱금·청석금·고락금 등의 마을 지명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금광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거금도 적대봉 © 리폼드뉴스


○ 절이도(거금도) 해전 승전탑

 

전남 고흥군 도양읍인 녹동에서 소록대교를 거쳐 거금대교를 거쳐 거금도(금산)에 도착하면 ‘절이도 해전 승전탑’이 있다. 

 

 절이도(거금도) 해전 승전탑 © 리폼드뉴스


절이도 해전은 임진왜란 마지막 해인 1598년 7월에 조ㆍ명연합수군이 고흥 바다를 침입한 왜군을 격퇴한 전투이다.

 

선조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해임하고, 그해 7월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게 대패한다. 이에 선조는 8월 3일 이순신을 다시 산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절이도 해상 승천탑에서 소록도를 바라본 광경 © 리폼드뉴스


이후 이순은 수군 재건에 진력하여 명량해전에서 대승하고, 고하도(목포)에서도 전선과 수군을 보강하고 군량미를 비축한 뒤 고금도(완도)로 이동한다. 1598년 7월에는 명나라 진린(陳璘)이 이끄는 수군과 합세하여 조ㆍ명연합수군의 첫 작전인 절이도 해상전투에서 승전한다. 

 

○ 절이도(거금도) 목장성(高興 折爾島 牧場城)

 

조선 시대에 거금도를 절이도라고 했다. 절이도에 목장성이 있었는데 이를 ‘절이도 목장성(高興 折爾島 牧場城)’이라 한다. 거금도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으로 2002년 11월 27일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절이도(거금도) 목장성 안내 표지판 © 리폼드뉴스


목장 성은 거금도의 어전리와 석정리 일대에 위치해 있다. 이 목장성은 적대봉(592.2m)과 용두봉(418.6m)의 중간 계곡을 형성하는 부분과 두 봉우리가 연결되는 능선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을 중간으로 나눈 남북방향으로 축성되어 있다.

 

성은 완만한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 부분의 서쪽 사면 끝자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해안선까지 이어진다.

 

 절이도 목장 성 흔적 © 리폼드뉴스


全羅道 點馬別監 朴埴 道內興陽 折爾島 周回 二白七十里水草 具足可放馬 八白餘匹 請以 會寧浦 金甲島 突山 南桃浦 於蘭浦等 諸浦船軍修築 從之(『조선실록』 세조 12년(1430) 2월 기축(己丑) 조(條)

 

(전라도 점마별감 박식도내흥양 절이도 주회 이백칠십리수초 구족가방마 팔백여필 청이 회령포 금갑도 돌산 남도포 어란포등 제포선군수축 종지)

 

 절이도 목장 성 안내 표지판 © 리폼드뉴스


전라도의 전마별감 박식이 아뢰기를 “도내의 흥양 절이더 주위가 2백 70리인데,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말 8백여필을 방목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회령포, 금갑도, 덜신, 남도포 어란포 등 여러 포구의 선군으로서 목작을 수축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 세조 12년(1466) 전라도 점마별감 박식의 주청에 의하여 말을 기르기 위해서 절이도 가까이에 있는 선군(船軍)을 동원하여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축성 당시 절이도 목장성에는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약 800여필의 말을 기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절이도 목장 성 안내판  © 리폼드뉴스


또한 성종 1년(1470)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복시 제조(司僕寺 提調)가 각지에서 기르는 마소의 원래 숫자와 현재 잃어버린 숫자를 아뢰다. … 흥양의 도앵곶(道陽串)이 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6백 66두였는데 고실이 1백 36두, 유실이 5두이며, 절이도에는 본래 방목한 말이 3백 64두였는데 고실이 72두이며 ….

(『조선왕조실록』 성종 1년(1470) 1월 계미(癸미) 4일 조(條))

 

성종 1년(1470)에는 364필의 말을 방목하고 있는 등 절이도 목장은 조선 전기에 중요한 목장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흔적으로 남아 있는 절이도 목장 성 © 리폼드뉴스

  © 리폼드뉴스


또한 “절이도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으니, 둘레가 1백리요, 목장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40권 흥양현 산천조(山川條)).

 

이 성은 중간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축조된 차단성 즉 장성(長城)이며, 돌을 쌓아 만든 성이다. 성벽의 길이는 섬 북쪽 유적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제하고도 4,652m에 이른다. 너비는 하부 3.2m, 상부는 1.4m이다.

 

  © 리폼드뉴스


절이도 목장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흔치 않은 목장성이며, 축성시기 등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등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 김일 선수 기념 체육관

 

“힘들고 어렵던 시절 박치기 한방으로 온 국민의 한을 씻어주고 웃음과 희망을 주었던 박차기 왕 김일 우리들의 영웅을 이곳에 영원히 기리다.”

 

거금도에 프로 레슬링 김일 선수(1929-2006)의 기념박물관 표지석의 글이다. 전남 고흥 금산면 어전리의 평지마을에 세워져 있다. 김일 기념관에는 고인이 시합 때 입었던 옷이나 상패 등이 전시되어 있다. 면민들이 뜻을 모은 공덕비와 그의 슬픈 추억이 깃든 진돗개 동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김일 선수 기념 체육관 © 리폼드뉴스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는 1929년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에서 태어나 1957년 역도산체육관 문하생으로 입문하면서 레슬링을 시작해 1963년부터 1972년까지 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 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의 활약을 하고, 2006년 10월 심장마비로 숨져 고향에 묻혔다.

 

  © 리폼드뉴스


김일 선수 기념관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명사이며 ‘박치기의 제왕’인 프로레슬링 전 WWA 세계 챔피언인 김일 선수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1998년 4,000여만 원을 들여 조립식 건물로 지어진 30평 규모의 평지마을 김일 기념관을 지방비 15억 원과 국고 지원비를 포함한 총 30억 원을 들여 김일 선수 고향인 금산면 어전리 평지마을 일원 2,000여 평의 대지에 건평 500평 규모의 건물을 지어 기념관(200평)과 체육관(300평)을 겸한 김일기념체육관이 조성되었다.

 

김일 선서 기념 체육관 정면 모습  © 리폼드뉴스


기념관에는 평생 3,000여 번의 링 위에서 뿌린 땀과 정열 그리고 김일 선수의 역사가 담긴 우승 트로피와 우승컵, 챔피언 벨트, 기념패,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아직 일본에서 가져오지 못한 기념패도 많고 일부 분실되어 아쉬움이 남지만, 거금도의 자랑거리이다.

 

그는 1960~70년대 반칙을 일삼는 일본의 야비한 레슬러들이나 자이언트 바바와 같은 거구들을 주특기인 박치기로 쓰러뜨리는 장면이 흐릿한 흑백화면에 나오면 모든 국민들은 통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거금도 오천에 있는 소원 동산에서 바로본 바다 풍광 © 리폼드뉴스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에게 숱한 희망과 감동을 안겨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일 선수에게 소원 한 가지를 묻자 고향 거금도에 전기 가설을 희망했다. 이렇게 하여 거금도 전기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14년만인 2020년 5월 22일에 현충원으로 이장하여 안장식 가졌다. 김 선수는 국민훈장 석류장과 국민체육훈장 맹호장 수훈, 국민훈장 청룡장 추서 등 대한민국 프로레슬링 1세대 선두주자로서 공헌을 뒤늦게 인정받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으로 이장했다.

 

○ 거금도 금의시비공원

 

대흥에서 오천 방향을 가다가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를 접한 쪽으로 널찍한 데크에는 전망대가 있고 전망대에서 감상하는 수려한 해안 풍광과 눈부신 은빛 바닷물결과 함께하는 금의시비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2009년에 조성됐다.

 

거금도 금의시비공원  © 리폼드뉴스


국토교통부 2018년 7월 23일 전남 고흥에서 경남 거제까지 ‘남해안 오션뷰(Ocean View) 명소 20선’을 선정해 발표했다. 국토부는 남해안을 국제적인 해양·생태 관광 거점이자 서울·제주·부산에 이어 국내 제4대 관광 거점으로 육성한다는 목표 아래 '남해안 발전거점 조성 기본구상'을 수립했다.

  

 거금도 금의시비공원, 어머니의 사랑 © 리폼드뉴스


‘오션뷰 명소 20선’ 선정·발표는 남해안 해안 경관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 위한 방안으로 추진되었는데 고흥군이 다섯 곳(금의시비공원, 녹동전망대, 더수연안길 어부림, 지붕 없는 미술관, 우주 발사전망대)이 선정됐다. 이 가운데 금의시비공원이 20곳 가운데 한 곳으로 선정될 정도이다.

 

거금도 금의시비공원, 고향  © 리폼드뉴스


국토부는 2021년 전남 고흥 금의 시비공원 내에 28억 원의 사업비로 복합문화공간(400㎡), 화장실, 전망대, 공원시설정비 및 조경공사(2,500㎡), 산책로 계단(100m)를 설치키로 하고 예산을 편성했다.

 

금의시비공원은 철쭉, 섬사람들-이연숙, 어머니의 사랑-;최공숙, 공향-윤솔아, 인간은 만남으로 자란다-유달영, 농부의 마음-;이의민, 젊은 날의 초상-송수권, 불꽃-이성선, 행복-나대주, 정봉준-장효문, 무명의 꽃 신광주 등의 시가 커다란 자연석 바위에 새겨져 주변의 그림같은 풍경과 지붕 없는 미술관과 같은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거금도 금의시비공원, 정봉준  ©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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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비시비공원에서 돋보인 것은 장효문 선생의 ‘정봉준’에 대한 시가 눈에 들어온다. 장효문 선생은 필자의 녹동중학교 재학 시절 담임선생이었다.

 

녹동중학교 1학년 때인 1974년 ‘들쥐 떼의 울음’으로 <시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장효문 선생님을 만났다. 그는 <들쥐 떼의 울음> 외에 <서사시 정봉준>, <아버지 저 무지개가 보입니다>, <신의 눈물> 등을 발표했으며, 고흥고와 고흥여고에서 30여 년 동안 시인으로, 교편생활을 하다가 2009년 3월 4일에 지병으로 향년 69세로 타계했다.

 

장효문 선생이 녹동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봉직하면서 1974년에 <들쥐 떼의 울음>이라는 시를 발표할 때 그의 제자였으니 그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붙여준 별명은 일명 용팔이였다. 필자의 일기장에서는 용팔이 선생님인 장효문 선생님이 필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깨알처럼 기록돼 있다.

 

  © 리폼드뉴스


청라 장효문 선생은 2009년 3월 4일 지병으로 향년 68세로 별세하였으며, 광주 북구 망월동 묘역에 안장되었다.

 

장효문 선생은 그의 나이 51세 때인 1982년 1만8천 행에 달하는 장편서사시 <전봉준>을 발표, 한국 서사시 사에 한 획을 그은 바 있다. 장효문 선생은 창작 판소리 <전봉준>을 완성하면서 “정치 상황은 물론이고 특히 위기에 빠져 있는 오늘의 농촌”을 떠올렸다.

 

거금도 둘레길  © 리폼드뉴스


원고지 5백 장, 완창에 6시간 걸리는 이 판소리는 94년 갑오농민전쟁 1백 주년에 때맞춰 불려질 것이지만 단순히 “동학의 제단’에 올려지는 의전용은 아니다. 그는 1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농민과 민중이 처한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전봉준> 서사시의 저자인 장효문 선생의 <전봉준>의 시가 금의시비공원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필자에게는 크나큰 감격이었다. 고향 홍연을 터전으로 삼은 소 씨 조상의 후손으로 거금도에 정착한 소 씨 집안의 종손인 필자는 녹동중학교에서 담임인 장효문 선생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 오천저수지와 기념탑  © 리폼드뉴스

 거금도 오천 소원동산 © 리폼드뉴스


○ 홍연 윤선도 선생의 기념식수 고산목

 

 거금도 홍연 윤선도의 기념 식수 고산목 © 리폼드뉴스

  © 리폼드뉴스


1963년 거금도를 찾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거금도의 수려한 경관에 감탄 거금 팔경을 읊으며 홍연 마을에 기념 식수했던 고산목이 남아 있다.

 

 거금도 홍연 윤선도의 기념 식수 고산목 © 리폼드뉴스


홍연 마을은 조선 시대에 홍리(紅里)라고 부르고 또 적대봉 산록에 위치하여 마을 옆에 용(龍)이 누워 꿈틀거리는 모양처럼 생긴 횡용(橫龍) 등이라는 곳이 있어 한때 횡용(橫龍)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3년도에 홍수로 인하여 수십 가옥이 유실된 후로 홍연(紅蓮)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적대봉 계곡으로부터 명천 마을 앞을 흐르는 10 리장천(里長川)의 근원지가 바로 적대봉 밑에 있는 홍연 마을이 근원지가 된다.

 

거금도 홍연 윤선도의 기념 식수 고산 안내 표지석  © 리폼드뉴스

 

▲     ©리폼드뉴스

 
고산 윤선도 선생은 인조 대왕이 청나라에 항복한 것을 한탄하여 세상을 등지겠다는 마음으로 제주도로 향하던 중 보길도를 지날 무렵 폭풍을 만났다. 그가 보길도의 산수에 취하고 아득한 경치에 매료돼 그곳에 정착하기로 한 후 찾아낸 거처가 비로 부용동이었다.

 

 거금도 홍연 윤선도의 기념 식수 고산 © 리폼드뉴스


윤선도 선생이 51세에 보길도에 첫발을 디딘 이후 85세 나이로 이곳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데 그 중 14여 년을 부용동에 머물면서 우리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인 ‘어부사시사’(40수) 와 32편의 한시를 남겼고 우리 조경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연정’을 건축하여 후세에 남겼다.

 

홍연마을, 필자 기념  © 리폼드뉴스


윤선도는 보길도에 머물면서 주변의 경치가 좋은 곳을 돌아다녔는데, 그때 거금도에 왔다 갔으며, 홍연 마을에 잠시 머물면서 거금 팔경을 지었다.

 

▲ 적대봉에서 내려다 본 홍연 마을, 거금도 섬이면서 바다를 볼 수 없는 마을, 사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쌓인 마을이다.  © 리폼드뉴스

 

홍연마을의 진입로가 1차선으로 군 도로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군 도로 요건을 위한 2차선 도로 확장 공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다. 거금도 방문에서 홍연 고산목 방문은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어 가고 있다.

 

○ 거금도 기독교의 전래 역사

 

한국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를 통한 복음은 미국북장로교선교회 소속 앨런 선교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제물포를 통해 들어온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음 해인 언더우드 목사 선교사가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호남선교는 다른 지역에 비해 늦은 시기인 1892년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는 한국 선교를 시작하고 최초로 7인을 파송함으로 시작되었다. 이를 ‘7인의 선발대’라고 한다.

 

▲ 호남을 선교지역으로 활동한 미국 남장로교선교부 7인 선발대  © 리폼드뉴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 7인 선발대 선교사 중 훗날 평양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레이놀즈(Mr. William D. Reynolds: 이눌서)를 비롯하여 ②그의 부인(Mrs. Patsy Bolling Reynolds) ③전킨(Mr. William B. Junkin: 전위렴) ④그의 부인(Mrs. Mary Leyburn Junkin) ⑤테이트(Mr. Lewis B. Tate: 최의덕) ⑥그의 여동생 테이트(Miss Samuel M. Tate: 최마태) ⑦데이비스 양(Miss Linnie Davis) 등이었다.

 

7인 선발대는 1894년 3월 27일 아침 7:30분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강화도에 오후 2시 30분에 도착하여 배를 통해 3월 29일 아침 8시 30분에 출발하여 제물포에 새벽 4시 30분에 도착했다. 다시 제물포에서 군산을 통해 호남의 전역을 탐방했다.

 

4월 18일에 목포에 도착하였으며, 진도, 완도를 거쳐 4월 27일 신지도, 져리도(조선 시대 거금도를 절이도(折爾島)라 했다)를 거쳐 녹동에 도착했다. 녹동에서 오후 4시에 점심을 먹었다. 녹동을 통해 고흥을 거쳐 벌교, 순천과 좌수영을 통해 남해 부산에 도착했으며, 5월 10일에 부산에서 출발하여 제물포에 5월 12일 오후 5시에 도착했다.

 

 거금도 최초의 교회, 신흥교회 © 리폼드뉴스

 

거금도에 최초로 선교사가 입국한 것은 미국 남장로회선교회 호남의 선교를 위한 답사가 이루어졌는데 1894년 4월 27일이었다. 당시 거금도를 절이도라고 했는데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7인 선발대의 답사 기록에 의하면 ‘져리도’로 기록되고 있다.

 

 신흥교회는 현재 통합측 교회이다.  © 리폼드뉴스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상)』는 1906년에 “고흥군 왕하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오기원 조사 오태욱의 전도로 신우구 박용섭, 박무응, 이춘흥, 이정권 등이 밋고 사저 혹 서당에셔 회집 예배하니라”고 기록하여 고흥군의 최초의 교회로 기록하고 있다.

 

1894년에 거금도에 최초로 선교사들이 방문한 이후 1907년에는 “고흥군 신흥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한익수, 선영홍이 경성에 여행하얏슬 시에  복음을 드른후 밋고 성서 수백책을 재래하야 금산 전도에 전파함으로 신자가 다귀하야선영홍 사저에셔 예배하더니 선영홍이 배교하난 고로 신흥리에 예배당을 신건하니라”『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상)』고 기록하고 있다.

 

 명천교회 © 리폼드뉴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발행한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상)』에서는 신흥리교회가 1907년에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교회가 설립된 과정을 살펴보면 한익수와 선영홍이 울(경성)을 방문했다가 복음을 접하고 예수를 믿고 성경책을 구입하여 금산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다.

 

예수를 믿는 무리들이 많게 되자 선영홍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선영홍의 집은 “대흥리 선영홍”집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신평교회 설립기록에서 밝혀진 내용이다. 금산에서 최초의 예배는 대흥리 선영홍씨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영홍씨가 배교했다.

 

▲오천교회는 합동 측 교회이다.     ©리폼드뉴스

 

금산으로 돌아와 전도하여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까지 했던 자가 예수를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렇게 되자 선영홍 집에서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대흥리에서 신흥리에 예배당을 세워 신흥리교회가 되어 금산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 대흥교회  © 리폼드뉴스


신흥리교회는 선교사나 그의 조사가 전도하여 교회를 설립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최초의 교회인 1883년 소래교회처럼 전도를 받은 토착민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설립하게 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신흥리교회가 설립된 다음 해인 1908년에 “고흥군 금산 신평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오석주, 박수홍 등이 주를 믿고 대흥리 선영 홍가에셔 예배하다가 기후 신흥리 교인의 협조로 본리에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신축하니 교회가 점차 발전하야 오천, 동정 양처에 교회를 분립하게 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평리교회는 현재 명천교회이다.

 

 남천교회(좌)와 금산교회(우) © 리폼드뉴스


신흥리교회에 이어 신평리교회가 세워졌다. 오석주, 박수홍 등이 대흥리 선영홍 집에서 드린 예배에 참석한 자들이다. 이들이 대흥리에서 신흥리 교인들의 협조를 얻어 신평리에 교회당을 세워 신평리교회를 설립했다.

 

초기 신평리교회를 함께 설립했던 오석주는 전남노회 제7회(1917. 8. 24.) 정기회에서 남궁혁과 함께 신학지원을 허락받아 신학을 마친 다음에 1924년 순천노회에서 강도사 시취를 거쳐 전도목사로 목사안수를 받아 사역하였다.

 

▲ 월포교회  © 리폼드뉴스


그는 1936년 기점으로 신사참배 거부와 미국의 스파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순천노회 소속 목사들과 함께 1938년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다음 해인 1938년에는 그동안 8년 동안의 회계직무를 그만두고 순천노회 제22회(1938. 4. 25.) 정기회에서 노회장에 취임했다. 신평리교회(명천교회) 출신 오석주 목사는 한국교회, 특히 광주전남지역의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 성치교회  © 리폼드뉴스


신평리교회가 성장하여 오천, 동정에 교회를 분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21년에 이르러 “고흥군 동정리교회가 신평리교회에서 분립하다. 선시에 본리거 김치곤, 정익원, 최자신, 최관숙등이 믿고 신정리교회로 다니더니 시년 에 선교사 구례인과 조사 오석주가 내조 전도하여 6간 예배당을 건축하고 분립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상)』는 1915년에 오천교회 설립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흥군 오천교회가 설립되다. 선시에 우도리 신성주, 황재연과 신흥리 한상하의 전도로 신자가 계출하여 초가 6간을 매득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고 신평교회에서 황보익, 오현규 양인이 내주하므로 교회에 다대한 노력을 공하였고 기후에 황봉익이 교회를 인도하니라.”고 기록한다. 이 기록은 신평리교회에서 분립되어 설립된 교회이다. 신평리교회 뿐만 아니라 동정교회도 신평리교회에서 분립되어 설립되었다.

 

▲ 거금도 오천 몽돌 해변  © 리폼드뉴스


오천교회 자체 역사에서는 1913년을 교회 설립해로 기록하면서 “1913년 3월 10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오천리 170번지에 소재한 6칸 초가 당에서 금산면 신흥리에 살고 있던 한익수 장로와 본 마을 신선애, 관성주, 황재연, 한상하 성도가 모여 예배 드리다.”라고 2013년 4월 25일에 교회 경내에 1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소재열 목사(칼빈대학교 한국교회사 Ph.D., 조선대학교 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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