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열, 다문화 가정(이방인)에 대한 성경적, 교리적 이해와 접근: 총체적 복음의 관점에서

김순정 | 기사입력 2013/10/16 [10:21]

김광열, 다문화 가정(이방인)에 대한 성경적, 교리적 이해와 접근: 총체적 복음의 관점에서

김순정 | 입력 : 2013/10/16 [10:21]

이 논문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김광열 교수가 개혁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으로 요약하여 소개한다.

 

1. 서론: 다문화 가정과 총체적 복음

오늘날 세계는 하나의 마을로 변화되고 있다.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세계화의 물결이 이제는 전 세계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 미국만이 다민족 국가가 아니라, 우리나라도 가는 곳마다 외국인들을 쉽게 만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해마다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오고 있는데, 사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생산직 근로자로서 입국하면서 그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2년에는 이 주노동자 도입을 위한 법제정이 이뤄지면서 중국, 동남아시아, 남부 아시아 등 여러 나라들로부터 외국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그들은 소위 “Korean dream”을 꿈꾸며 우리나라를 찾아왔지만, 그들의 삶의 현실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불법으로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경우, 부당한 대우들을 감내하면서 고통스런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사실 그러한 고통스런 삶의 모습은 6,70년대에 “American dream”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주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곳에서 외국인으로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부당한 대우들과 흡사하다. 또한 외국인들 중에는 한국 사람과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다문화 가정”을 이룬 후에도, 외롭고 힘든 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1990년 정부가 추진한 연변처녀와 한국농촌총각 사이에 맺어지는 결혼사업을 통해 다문화가정의 수가 급증하였다. 그러나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을 깊이 간직해온 우리나라 사회 속에서 그들은 쉽게 배척당하게 되고, 소외감을 느끼면서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에 나타나는 이러한 새로운 현상은 하나의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어 정부에서도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해왔다. 그러나 본고에서의 관심은 다문화 가정에 대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인식과 접근방식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에 있어서도 여전히 “배타적인” 모습들은 극복되지 못하고 남아있어 복음의 정신으로 소화해야할 과제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위에서 그와 같은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는 외국인들 혹은 다문화 가정들을 성경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복음의 정신으로 어떻게 접근해야할 것인가를 정리해야 할 것이다. 과연 성경교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외국인(이방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그들을 어떠한 자세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그런데 다문화가정을 위한 사역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한 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신자가 외롭고 힘든 외국인들에게 다가감에 있어서 그들의 인권문제나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영적 부분을 돕지 못하는 방식이나, 혹은 그 반대로 그들의 영혼구원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실제적인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의 부분들은 돌봐주지 못하는 방식은 모두 다 이방인에 대해 취해야할 태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균형 있게 반영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서 필요한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총체적 복음의 관점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총체적 관심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자녀들도 외국인들을 대함에 있어서 총체적 복음의 관점으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며 사랑의 섬김을 베풀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먼저 이방인들(다문화 가정)에 대해 신자가 취해야 할 태도와 사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총체적 복음의 관점에서 성경적, 교리적으로 살피려한다. 성경의 내용과 교리의 가르침들은 신자들이 다문화 가정들을 총체적 복음의 관점으로 섬겨야함을 가르친다. 즉, 복음전도를 통한 영혼구원의 사명과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의 실천의 사명이 함께 이루어지는 총체적 사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고의 전반부에서는 구약과 신약 속에서, 그리고 성경교리의 가르침들 속에서 그 두 가지의 사명들이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그 두 가지의 사역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의하려 한다. 그 두 가지의 사역들은 서로 혼동되어서도 안 되지만, 또한 분리될 수 없는 사역들임을, 그리고 그 두 가지의 사역들 중에서 우선 순위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리한 후, 결론을 맺으려 한다.

 

2. 다문화 가정(이방인)을 위한 총체적 복음사역의 성경적, 교리적 근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을 대함에 있어서, 자신들이 먼저 이방인의 삶을 살았던 과거가 있었음을 기억하라고 명하신다. 이방인들과 나그네들을 어떻게 섬길 것을 명하시는 구약의 많은 본문들은 그러한 섬김의 이유로서, 자신들이 애굽에서 이방인으로서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었음을 기억하고 그들을 보살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실 구약의 성도들은 역사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것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들 모두는 나그네의 인생길을 걸어갔었다고 말할 수 있다(히11:13-14). 또한 신약의 성도들도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모두 다 “외국인과 나그네”의 인생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성경은 성도들로 하여금 먼저 자신이 이방인과 나그네의 인생길을 걷는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서 이방인들과 나그네의 인생을 살아가는 주변의 이들을 섬기고 돌아보면서 함께 본향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그네와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섬기는 신자의 사명에 대해서 성경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해준다. 하나는 복음전도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여 본향을 향하는 인생으로 변화시키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나눔과 섬김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이웃으로서 그들에게 다가서는 일이다.

 

2.1. 복음전도를 통한 영혼구원의 사명

열방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에 근거하여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민의식” 사상이었다. 즉, 유대인들은 여러 민족들 중에서 자기들만이 홀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다른 이방인을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구원계획 안에는 결코 민족적 혈통에 근거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음을 성경은 가르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은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들과의 집합적인 약속이라고 간주하면서,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들만이 택한 백성으로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참 이스라엘은 육적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임을, 그리고 그 약속의 근거는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로마서 9:7-9에서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10-13절에서는 야곱과 에서 모두가 똑같이 유대인의 혈통이었으나 그 중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의해서 야곱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즉, 바울의 요점은 구원의 대상은 유대인의 혈통적 근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기초하여 주어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구원은 구약 시대부터 유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에게로 향하고 있었음을 성경이 증거 한다.

먼저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축복의 내용에서부터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자손들에게 주어질 구원의 은총은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의 자손,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언약하실 때, 아브라함을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언약의 복은 궁극적으로 이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로 향하는 “우주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구약시대에 언약은 외형적으로는 민족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지만, 사실은 구약시대에서부터 은혜언약의 구원은 “초유대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언약의 회중에 들어왔던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12:48-49에 보면, 이방인들도 언약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었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언약 공동체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도 자신들의 혈통적 근거에 의해서 항상 언약의 축복이 보장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불신앙에 떨어질 때 언약 백성의 공동체에서 제외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시대에서부터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려져 있었다는 사실은 구약성경의 여러 내용들 속에서 확인된다. 룻기서의 내용에서도 이방 여인이 메시야의 족보에 영입되는 사건으로 보아스와의 만남이 소개되고 있으며, 기생 라합의 기사 속에서도 이방인의 언약공동체로의 영입이 확인된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에게 약속된 구원의 은총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전을 건축하고 드렸던 솔로몬의 봉헌기도의 내용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미 땅의 모든 족속들이 주께로 나아오는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약에서 (이방인을 포함하여) 열방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언급과 사건들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지만,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는 내용들 중의 하나는 역시 요나서이다. 요나 선지자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있었던 배타적인 사람이었다. 더욱이 원수나라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의 백성들을 회개케 하여 하나님의 은총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박 넝쿨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도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욘 4:1-11). 이방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은 신약시대에 더욱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셨던 지상사역에 있어서 결코 그 사역을 유대인들에게만 제한하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당시에 혼혈족으로서 유대인의 배척대상이었던 이들에게도 천국복음을 전하시려는 예수님의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정통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사마리아인들은 이방나라 앗시리아와의 혼혈족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는 이방인과 같은 대상이었지만, 주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로 가는 길을 택해서 그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던 것이다. 누가복음 7:11 이하에 나오는 열 명의 나병 환자 치유 사건 속에서도 사마리아인이 포함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 외에도 주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하신 일(마15:21-28), 두로와 시돈 지방 (막 3:7-8) 등 이방 땅으로까지 나아가셔서 복음사역을 계속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열방과 만민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은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주셨던 대위임령(Great Commission)에서도 분명히 제시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 주님은 또 다른 본문에서도 제자들에게 회개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을 말씀하셨다(눅24:47-49).

그리고 사도행전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행적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명령이자 또한 약속이 담겨있는 행1:8의 구조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게 되는 복음전파의 진행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10장에서 이방인 고넬료의 성령세례 사건이 소개되면서 이방인에게까지 구속적 은총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획이 확증된다. 더 나아가, 안디옥교회가 이방인 선교를 위한 공식적인 사역자로 바울과 바나바를 세우면서 이방인을 향한 복음사역의 새로운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구속적 사랑이 증거 되며 구원의 역사가 주어지는 것이 자신의 뜻임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사실, 이방인을 포함한 열방에게로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섭리 속에서 우리나라에도 100여 년 전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이제는 우리 곁에 보내진 이방인들에게 그 사랑을 전해야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2.2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 실천의 사명

소외된 이웃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에 근거하여 성경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과 함께 또 다른 중요한 사명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졌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이방인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나눔을 실천하는 이웃으로서 그들을 품에 안아줘야 한다는 가르침들 속에서 찾아진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인과 나그네를 관심하며 돌볼 것을 명하셨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안식일의 계명에서부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 이방인이 언약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그 들에게도 쉼이 허락되도록 배려해야함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즉, 성경은 언약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을 말할 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도 말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의 대상들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하나님은 그들이 언약백성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에게 보편적 사랑을 베풀 것을 명하고 계신 것이다. 이방인들은 구약시대에서 이스라엘이 섬겨야할 자비와 사랑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대표적인 이웃들 중의 한 그룹이었다. “기업이 없는 레위인, 고아와 과부”는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계층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와 사랑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그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로 분류된 이들이 바로 “객과 이방인”이다. 그들도 모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계층의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 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29).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약의 여러 제도들을 통해서,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이방인)들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명하셨던 것이다. 십일조 제도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매 삼 년 끝에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안식년 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안식년 소출이 나누어질 것을 명령하신다. 그 외에도 안식일 제도에 있어서 안식일의 쉼을 “나그네”와 함께 누릴 것을 명하시며, 추수자의 규례나 그 밖의 여러 제도들 속에서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 것을 명령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그네와 이방인들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학대하거나 부당하게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과거에 애굽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22장과 23장에서 하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압제하거나 해롭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시면서, 그 대상들 중에 과부와 고아도 포함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 먼저 이방인을 언급하신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 22:21-24).

신명기 24장에서는 어려운 이웃에게는 임금체불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사는 어려운 품꾼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품삯은 당일에 해지기 전에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생활이 어려운 이들은 당일 품삯으로 살아가므로, 그들에게 임금체불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고까지 말씀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힘있는 자들이 이방인들을 억울하게 판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신 24:17), 이방인들에게 억울한 송사를 집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신 27:19).

결국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고아나 과부와 같은 힘없는 사람들로 분류하면서 그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돌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공평한 대우와 법적인 보호까지 베풀어줄 것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2.3 다문화 가정을 위한 총체적 복음사역의 성경교리적 근거들

이제까지의 논의의 요점은, 결국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에 근거한 영혼구원의 사명으로 다가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에 근거하여 그들에게 나눔과 섬김의 사랑으로 나아가야함을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정리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이방인들을 섬김에 있어서 총체적 복음의 관점에서 영혼구원과 함께 사랑 나눔을 실천하는 총체적 사랑으로 다가가야 함을 가르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이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바, 영혼구원과 사랑의 섬김을 함께 하는 총체적 복음사역의 성경 교리적 근거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몇 가지 항목들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2.3.1 먼저 신론과 기독론 안에서 -구속적 사랑과 함께- 제시되고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보편적 사랑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총체적 관심은 그 분의 속성들에 대한 설명들 속에서 찾아진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제시해준다.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는 자기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을 만나게 될 뿐만 아니라(요3:16; 롬 8:32), -앞의 항목(2.2)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특히 구약성경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관심하시며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만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구속적 사랑 뿐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는 모습 속에서(시 68:5-6; 146:6-10; 잠 17:5; 잠 19:17), 가난한 자를 변호하시며 그 대신에 압제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렘5:26-29; 겔22:23-31), 그리고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타국인과 나그네를 돌보시는 모습 속에서(출 3:7-10; 출 22:21-24; 출23:9; 신 10:17-19; 신 26: 5- 11) 드러나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그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타국인을 배려하시는 모습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구약의 여러 제도들 속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십일조, 안식년, 안식일, 희년제도, 그리고 추수자에 대한 규례나 제사법 속에서 하나님은 고아나 과부와 같은 가난한 자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나그네들에게도 사랑을 베풀 것을 명하셨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총체적 관심과 사랑은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들 속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 분의 지상사역은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천국복음의 선포로 시작되었다(막1:14-15).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복음 선포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말로만 복음을 외치셨던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시면서 동시에 병자를 고치시고 소외된 자들의 삶 가까이 다가가서 친구가 되어주고 더 나아가 종으로 섬기는 사역으로까지 나아가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복음사역의 모범은 오늘 우리의 복음사역도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전파와 함께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실천의 사역이 병행되는 총체적 복음사역이 되어야함을 말해준다.

우리가 그 분의 복음사역의 모델을 따르려한다면, 그 분은 그냥 하늘의 영광 보좌에 앉으셔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낮고 천한 구유에 피조물 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으며, 그리고 또 소외되고 힘없는 자들에게로 찾아가셔서 그들의 육적, 물질적 고통을 끌어안으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하셨던 모범을 따라서 우리도 섬김과 봉사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복음사역, 즉 총체적 복음사역을 수행해야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총체적인 관심은 무엇보다도 그의 가르치신 교훈들 속에서 확인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그리고 그의 사역도 바로 같은 주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따라서 예수님의 최초의 선포의 주제도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읽으셨던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하나님 나라 사역이 어떠해야함을 잘 밝혀주었다.

물론 누가복음 4장에서 인용한 이사야 61:1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본문을 주로 물질적, 육체적 문제 해결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하기를 꺼려하는 자들도 부분적으로는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육신적 고통이나 가난 혹은 질병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도 가져왔던 사실을 인정한다. 사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이 땅에서 진행되었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사역들 속에는 그러한 섬김과 사랑실천의 사역들이 포함되고 있음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확인해볼 수 있다. 이 땅 위에 계셨을 때, 팔레스틴의 여러 지역들을 다니시면서 행하셨던 주님의 사역을 간략하게 요약한 사도행전 10:38의 말씀은 그러한 예수님의 총체적 복음사역의 성격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성구이다. 그 외에도 성경에서 예수님은 "이웃사랑"이라는 새계명을 주신 분으로 나타난다. 마태복음 22:34-40에서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해주셨다. 구약에서 두드러지게 제시되는 전자의 계명과 아울러, 예수님은 후자의 계명을 “새계명”으로서 강조하셨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31-46에서 참 믿음의 모습을 설명하실 때 그의 “새계명”을 더욱 분명히 제시하셨다. 그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약한 자, 가난한 자, 억눌린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여부가 참 믿음의 모습임을 지적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의 내용들 속에서 영혼구원의 문제와 사랑실천의 사명을 함께 고려하시는 예수님의 총체적 관심을 확인하게 된다.

 

2.3.2 인간론 논의들 속에서도 드러나는 총체적 복음의 관점들

인간론 논의에 있어서 본 주제와 관련된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교리이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가르침은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할 당위성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창세기 9:6에서 하나님은 생명을 죽이는 일을 금하는 명령을 하시면서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야고보 사도는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또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시면서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 부당한 이유로서 바로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약3:9).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어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그 분의 형상을 지니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인종이나 문화, 사회적 계급이나 성별과 연령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방인과 나그네라고 하더라도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로서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고, 또 그렇게 대우 받아야할 가치를 지닌 존재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인간을 하나님보다 더 근본적인 원리로 보며,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는 세속적인 휴머니즘은 거부되어야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존중돼야한다는 기독교적 휴머니즘은 그 정당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류창조와 타락,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사역이라는 기본적인 성경적 세계관의 관점을 떠나서 추구되는 단순한 “세속적 인간화”(humanization)의 선교사역들은 거부되어야 하지만, 성경적 가르침의 세계관 속에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사회 속에 소외된 이웃들(여기에서는 이방인과 나그네)의 삶의 회복을 위한 노력들은 -성경적 인간론의 관점에서- 그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 중에서 지적될 수 있는 또 다른 교리가 있다면, 인간의 구성요소에 관해서 가르치는 전인(全人)으로서의 인간 이해이다. 신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로서, 신자란 영적인 일들에만 관심하는 자들이며, 하나님도 성도들을 영적인 차원에서의 생활만을 관심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려는 태도를 들 수 있다. 즉,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들이고, 육신의 일들이나 물질적 생활은 세속적이고 죄악 된 일들이라고 구분하는 헬라의 영육이원론의 관점에서 신자의 생활을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다. 결국 그러한 태도는 복음사역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영혼구원의 문제에만 치우친 나머지 나눔, 봉사와 같은 사랑실천의 부분을 함께 고려하는 총체적 복음사역의 관점을 놓치게 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우주 만물들이 -인간을 포함하여- “선하게(good)” 지음 받았다고 가르친다(창1:31; 딤전4:4). 그렇다면 성경은 헬라의 영육이원론이나 중세적인 성속이원론을 포함한 어떠한 종류의 이원론적 사고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도 하나님의 선한 피조계에 속한 영역들임을 인정하고, 영적인 생활이나 교회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회생활이나 직장 생활을 포함한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며,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하는 것이다(성속이 원론의 극복). 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이웃에 대한 사랑실천에 있어서도 그 영혼에 대한 사랑과 아울러 그의 전존재와 모든 생활 속에서 섬기는 사랑이 함께 해야 한다는 말이다(영육이원론의 극복).

하나님께서는 결코 신자에 대해서 관심하실 때, 오직 그 인간의 영혼이 잘되는 일만을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혼이 잘됨같이 그의 육신도, 그가 속한 사회 속에서의 삶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가 베풀어야할 (이방인을 포함한)이웃에 대한 사랑은 -물론 이웃의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의 중요성이 인정되어야할 것이지만- 그의 영혼에 대한 사랑과 아울러, 그의 육체적, 물질적, 사회적 삶의 모든 부분들에서의 아픔들에 대해서도 관심하는 총체적 사랑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어둠의 권세에서 이끌어내시어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실 때에, 그들의 영혼들만을 빼내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과 아울러 그의 육신을 포함한 전인의 회복과 전인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복음사역이 단지 불신자의 영혼만을 돌아오게 하는 일로만 이해되고 있다면, 그 이외의 삶의 영역들에 서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관심들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혼구원이라는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사역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으나, 그와 함께 우리는 그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전인적인 삶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관심을 반영하는 총체적 복음사역의 관점으로 이루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2.3.3 구원론의 가르침 속에서 총체적 복음: 죄와 구원의 총체성

인간에게 죄가 들어온 것은 한 사람 아담의 타락 사건으로 말미암았다고 성경은 가르친다(롬5:12 이하).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들어온 죄는 단지 하나님과의 영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러 영역들 속에서 인간의 삶에 왜곡과 문제들을 가져왔다. 즉, 죄의 영향력은 총체적인 것이다.

물론, 일차적으로 죄는 하나님과의 왜곡된 관계를 야기 시켰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속에서 영적인 죽음 아래 살아가게 되었다.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하며 그 분의 낯을 피하고 숨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아담 이후의 구약의 백성들도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다(출19:20-22; 33:18,20). 그러나 죄의 영향은 거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범죄한 인류는 그 죄로 말미암아 수치심, 죄의식, 두려움, 자존감의 상실 등과 같은 왜곡된 자아상을 가지고 온갖 심리적인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창 3:7-19). 즉, 하나님과의 왜곡된 관계는 또한 자아와의 왜곡된 관계까지도 야기 시켰으며, 근심, 불안, 의기소침 등의 고통을 겪는 인생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하나님과의 왜곡된 관계는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까지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창세기 3:7에서 하나님께 범죄 했던 최초의 부부는 서로 간에도 껄끄러운 관계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아무 불편이 없이 지냈었던 그들은 범죄 후에 서로 자신들의 부끄러운 부분들을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려야하는 상황으로 떨어졌다. 서로에게도 감추어야하는 깨어진 관계로 전락된 것이다. 결국, 죄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최초 인류의 부부 사이의 갈등과 불화를 가져오는(창3:12-13) 수평적 차원의 문제도 야기 시키게 되었던 것을 보게 된다. 오늘날 죄의 권세는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불의, 인종차별, 전쟁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들에까지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온갖 종류의 사회적 문제들도 죄로부터 야기된 문제들인 것이다. 인간의 죄의 문제를 사회적 차원으로만 초점을 맞추려는 이들은 그 문제의 해결점을 사회의 구조적 문제의 차원에서만 대처하려하고, 개인적 죄에 초점을 맞추려는 이들은 이기심이나 개인적인 경건의 문제 등만을 지적하려 하지만, 사실상 그 두 가지가 모두다 죄로 말미암아 발생된 결과들인 것이다.

이처럼 죄의 영향력의 범위가 포괄적인 만큼, 우리를 그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주시려고 오신 주님의 복음도 포괄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구원의 능력이 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차원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차원에서 발생되는 죄의 모든 영향력들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총체적 복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통치(나라)로 말미암는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3:3,5) 그렇다면, 구원이란 하나님의 나라 만큼이나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전우주적인 왕권을 지니신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인 통치 아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도 또한 전포괄적인 성격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원은 성경에서 우주적인 성격을 지닌 사건으로 제시된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하심을 얻는 영적 축복이지만, 그것은 그러한 영적 축복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과 함께 신자의 육신도 새로워질 것(롬8:23),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우주와 사회와 만물이 모두 죄와 고통과 모든 저주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워지는 것까지도 바라보는 사건인 것이다(롬8:19-22).

사회가 회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민족이 중생하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개개인의 중생과 회심의 구원역사를 통하여 도시들과 사회들도 회복될 것까지 관심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은 개인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개인들이 속한 사회에까지도 그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역사인 출애굽의 사건도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적적으로 애굽에서 구출시켜준 이 사건은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적 관계의 출발을 이루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구원역사 후에 그들에게 주셨던 언약의 율법내용들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인 내용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들-가족관계의 문제, 성적 도덕성의 문제, 공공위생과 건강문제 등-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에 대해서도 지시하셨음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 안에 영적 신앙생활에 관한 문제와, 그들이 다른 이들 특히 사회 속에 연약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해야할 것에 대한 문제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신약에서의 또 다른 사례는 삭개오의 회심사건이다.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구원은 그가 다른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변화가 동반되었어야 했음을 잘 말해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삭개오는 곧 자기가 잘못 취한 것은 그대로 돌려줄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에게 구제할 것을 결단했다. 주님을 영접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에게서 기대되는 변화된 모습 속에는 영적 변화 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영역들 속에서의 변화까지 포함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볼 때, 구원이란 인간의 영혼의 중생되는 축복과 함께 삶의 모든 영역들 속에서의 변화와 회복까지 포함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문화 가정에 대한 복음사역의 목표와 비전도 죽은 영혼을 살리는 복음전파 사역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거기에서만 머물지 말고 그 영혼구원의 사명과 더불어 그들의 육체적, 사회적 차원에서의 변화와 회복을 위한 사역에까지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과 같은 성경교리의 가르침들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과 그분의 보편적 사랑은 모두 다 성경의 교리들 안에서 함께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다문화가정이 불신가정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안에서 섬김과 사랑의 대상이 된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에 기초한 복음사역의 차원에서도 총체적 구원론의 가르침을 따라 영혼구원의 사명과 아울러 그들의 육체적, 사회적 차원에서의 변화와 회복을 위한 사역까지 함께 포함하여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성경적, 교리적 논의들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이방인(다문화가정)들에 대해서 그들의 영혼구원과 아울러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총체적 복음의 사랑으로 섬기는 복음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3. 총체적 복음의 관점에서 제시되는 두 가지 사역 사이의 올바른 관계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 다문화가정(이방인)을 향해서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 선포의 사명과, 섬김과 사랑실천의 사명에 대한 성경적, 교리적 근거들을 확인해 보았다. 이제 남겨진 하나의 논의는 “과연 그 두 사역들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에 관한 것이다. 다문화가정들을 위한 복음사역들을 교회와 신자가 실제적으로 수행함에 있어서 그 두 사역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바로 이해하고 설정하는 것 또한 현실적으로 중요한 사안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항목들로 나누어 그 두 사역 사이의 관계성을 정리해보려 한다.

 

3.1. 먼저 그 두 사역들은 서로 구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각각의 사역들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나름대로의 고유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두 사역들이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 두 사역들에 참여하는 사역자들이 각각 서로 다른 의도와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일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선포에 참여할 때, 그 사역의 목표는 다문화가정의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여 회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섬김을 실천하는 일에 참여할 때, 사역자의 의도는 그들의 삶을 사랑으로 돌아보고 그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며, 육체적, 혹은 경제적 생활 속에서 회복을 가져오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신자가 다문화 가정을 위한 사역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먼저 고려해야할 점은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전도와 생활의 개선을 위한 사랑실천의 봉사는 모두가 필요한 사역이지만, 그 두 가지 사역들을 서로 혼동하거나 혹은 그 어느 한 가지의 사역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한 생각으로 혼동하거나 다른 사역을 간과하는 것은, 그 두 사역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사역 안에서 각각 나름대로의 고유한 정당성을 지닌 사역임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혼구원의 필요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섬김과 봉사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역의 중요성을 간과해도 안 될 것이며, 반대로 섬김과 봉사의 필요성만을 강조하다가 영혼구원의 중요성을 놓쳐서도 안 된다. 복음의 말씀을 제대로 증거 하지 못한 채, 단지 섬김의 봉사로 이뤄지는 사역만을 통해서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세속적인 복지사역이나 자선사업의 차원에서만 진행될 수도 있다. 또한 반대로 섬김의 봉사와 사랑의 실천 없이 말로만 복음을 외치는 방식도 무의미한 외침으로 끝나기 쉽다. 그것은 오늘 현대인들이 기독인들로부터 복음을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에서 성경과 교리적 가르침들 속에서 확인했던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보수적인 교회와 성도들이 범하기 쉬웠던 오류 중의 하나는 영혼구원에 대한 강조 때문에 섬김과 봉사 사역을 하나의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려는 태도였다. 다시 말하면, 후자의 사역을 단지 교회부흥의 수단정도로만 인식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교회에 등록할 것을 전제로 하고 베푸는 소위 “미끼 전도법”이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나 섬김과 봉사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역은 그 자체로서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서 자비와 사랑의 실천은 어떠한 조건 아래 이뤄져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다문화 가정을 사랑과 섬김으로 봉사할 때, 거기에는 어떠한 조건도 부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이방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자격요건에 충족되기 때문이다. 영혼구원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되겠으나, 동시에 그것을 조건으로 삼아 섬김과 사랑의 사역을 제공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물론, 신자의 봉사와 사랑의 실천으로 그들이 복음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자연스러운 결과를 배제할 필요는 없다).

 

3.2. 불가분성

그런데 잘못하면 위의 항목에서의 설명은 두 사역들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두 가지의 사역들이 서로 다른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사역들을 서로 분리된 사역으로 이해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그 두 가지 사역들이 각각 그 자체로서의 사역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나, 동시에 그 둘은 모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역이라는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 아래서 진행되는 사역들로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 두 가지 사역들은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또한 분리될 수 없는 사역들이라는 말이다.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섬김과 봉사의 실천이 복음전도로부터 분리될 때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대로 복음선포가 봉사와 섬김의 실천 없이 진행될 때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로 들려질 수 있다. 각각의 사역의 고유한 정당성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두 사역의 분리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복음전도와 사랑실천의 섬김이 불가분의 관계인 사실은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이 “총체적” 복음이라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총체적 복음이란 아담의 타락이 인류에게 끼친 죄의 결과와 영향력이 총체적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구속사역도 총체적이고, 따라서 주님의 우리에게 맡겨주신 복음도 “총체적” 복음이라고 보는 관점을 견지한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의 교리들 속에서 우리는 그 두 사역들이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사역들 속에서 그 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연결고리”들로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로, 사랑과 봉사의 실천은 복음전도의 열매가 된다는 차원에서 두 사역들을 서로 연결된다. 복음전도는 사랑과 봉사의 신앙과 삶을 그 열매로서 맺어주기 때문이다. 지난 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많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종으로서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살아간 사례들을 수없이 지적해볼 수 있다. 초대교회 이래로 주님의 복음은 사람들을 변화시켰고, 그 변화된 사람들은 이웃을 섬기며 사회를 변화 시키는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둘째로, 사랑과 봉사의 실천은 복음전도의 다리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실한 섬김과 사랑의 봉사는 이방인들(다문화 가정)의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들의 아픔을 품에 안고 위로하며 돌아볼 때, 복음전도의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미끼 전도법”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다문화가정을 위한 섬김의 봉사는 그 자체로서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봉사가 복음전도의 효과를 가져올 때, 우리는 기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만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단순한 마음으로 소외된 이들과 다문화가정들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섬김은 자연스럽게 복음전도의 열매가 풍성해지는 환경을 만들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사랑과 봉사의 사역들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전도의 열매들을 보호해줄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마약판매와 같은 여러 가지 범죄가 만연한 도심에서 회심한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볼 때, 그는 죄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범죄의 환경을 제거하고 건전한 직업환경을 조성하는 봉사와 사회적 노력들은 그러한 회심자가 신실한 신앙생활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3.3. 우선순위의 문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내용은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전도 사역과 사랑의 봉사 사역들은 서로 구별되어야 하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사역들로서 그 둘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의무들이지만 또한 복음전도가 우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러한 우선성(priority)의 성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첫째, 성경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가 바로 영생 혹은 구원의 문제라고 가르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서 영적인 것은 선하고 물질적인 것은 악하다는 영육이원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성경은 주님을 믿고 하나님을 순종하며 그 분과 영원히 사는 영생의 문제가 이 땅에서 건강히 지내며 70-80년 인

생을 풍족히 누리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막8:36에서 주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세상의 것들을 다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의 복음을 통해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사랑과 봉사를 통한 사역도 포기될 수 없는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역 자체만으로는 그들을 영생의 복으로 인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성경은 복음전도를 통한 영혼구원의 우선성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논리적으로도 사람이 먼저 복음을 받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야 참된 섬김과 사랑의 사역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때 이뤄지는 봉사와 섬김은 아직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문화 가정을 위한 교회와 신자의 봉사사역의 진정한 출발은 단순한 사회복지 교육에서 찾아질 것이 아니라, 복음전도를 통한 중생의 변화와 제자훈련을 통해서 준비되어야 한다.

셋째, 상황적 고려도 해야 한다. 사역의 현장에서 제기되는 현실적인 질문들 중의 하나는 복음전도와 사랑의 섬김 사역의 시간적, 재정적 배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역자 개인의 은사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교회가 처한 환경, 그리고 사역의 대상들이 처한 상황 등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고려해야 한다. 사역자의 은사와 소명의 다양성에 따라, 역할 분담이 이뤄져야 한다. 모든 신자와 모든 교회가 일률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모든 사역에 임할 수는 없다. 두 가지의 사역들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신자는 각자가 받은 소명과 달란트가 다르므로 그에 따라 사역의 우선순위가 분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 사역의 중요성만을 주장하고 다른 사역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나,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으므로 주어진 자기 은사에 집중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우선성은 융통성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역을 위한 재원의 한계나 시간 상의 한계 등을 고려하여 적절한 배분이 이뤄져야 한다. 요약하면, 원론적으로는 두 가지 사역은 모두 필수적이고 중요한 사역들임을 인정하지만, 현실에서의 다양한 상황과 한계들을 고려하여 적절한 사역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4. 결론

어느 덧 우리 사회 속에는 그리고 교회 주변에도 외국인들과 다문화 가정의 사람들이 깊숙이 들어와 함께 살고 있다. 낯설은 이방 땅에서 외롭고 힘든 여건 가운데 살아가는 그들은 분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돌아보라고 명하셨던 나그네요, 이방인들이다.

사실 우리도 육적으로는 이방 나라에 속한 이방인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의 축복 가운데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방인들을 돌아보라고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던 것과 같이, 그 명령은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복음의 부름에 순응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가 그들을 섬기고 봉사해야할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며,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의 대상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그들은 우리의 믿음의 형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섬겨야할 이웃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나 다문화 가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미전도 종족, 소위 10/40창 지역 선교의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우리가 먼저 찾아가서 주님의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할 사람들인데,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은 그들을 우리 곁으로 보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문화가정을 주님의 이웃사랑계명을 실천해야할 우리의 이웃으로 섬길 뿐만 아니라, 선교적 차원에서도 바라봐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 사역의 차원에서 다가설 때, 우리는 주님의 복음이 “총체적” 복음임을 기억하고 그들의 영적 회복과 함께 육신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 속에서의 회복을 이루어내기 위한 섬김과 봉사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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